새로운피조물의 계시로 보는 욥기 2번째 이야기
※대화체로 말씀하신 부분이 많아서 문맥에 맞게 조금 수정이 되었습니다. 내용이 많기 때문에 굵은 글씨 부분을 위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명확성과 정리를 위해 빨간글씨로 문단을 요약,정리 하였음을 참고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파란색 글씨는 성경말씀입니다.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우리를 둘러싸게 하시네요. 오늘도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릴 수 있는 귀한 시간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송합니다. 주님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으로 나의 심령을 조명하여 주시고 내 생각에 고정되어 있는 것들을 말씀으로 무너뜨리는 귀한 시간들이 되길 원합니다. 주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사쿠라이 집사님, 이렇게 정말 예배 시간으로 (은혜롭게) 인도하고 있네요. 정말 이렇게 찬양 인도하는 이 모습이 해가 지나고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모습을 보면서 너무 감사합니다. 말씀안에서 신앙 안에서 우리가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변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정말 이것이 내 삶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내 삶에서 영적으로 능력이 증가되는 거죠.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저 분이 영적으로 성장이 되었구나." 나는 "내 스타일 이러니까 나 만지지 마세요"라고 하셨던 분들도 그냥 부드럽게 둥글둥글하게 이렇게 되는... 우리가 복음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사람이 단순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시작
오늘은 우리 두 번째로, 항상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은 항상 욥기에 대해서 항상 복음이 아닌 것에 항상 이렇게 걸리기도 하고 누가 질문을 하면은 우리가 이것을 정확하게 복음 안에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은 나도 그냥 "아, 그게 맞나?"라고 하면서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목이 "새 피조물의 계시로 욥기를 한번 보십시오"라는 제목을 두 번째로, 오늘 우리가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개인적인 지식은 우리 영에 대한 이 확신과 담대함을 불러온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고백하고 영으로 기도하며 나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욥기는 희곡이다. 욥기서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33장 이후의 내용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게 욥기는 희곡이다. 희곡으로 이렇게 써져 있는데, 우리 나중에 이렇게 우리 정말 이 장래에 희망이 배우가 하고 싶은 분도 계시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정말 이것을 드라마로 희곡을 한번 연극을 하면은 확실하게 참 이렇게 잘 이해가 되겠다라는 그런 생각이 들고 한 번씩 우리가 중요한 요점마다 설교를 하고 나서 이거를 연극으로 이렇게 만들어서 한 번씩 이렇게 하면은 참 좋겠다라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욥기서를 보면은 이렇게 8명의 이런 우리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사단과 또 욥과 욥의 아내도 나오고 욥의 세 친구가 나오는데 엘리바스, 빌닷, 또 소발, 그리고 마지막에 엘리후라는 젊은이가 나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이 욥기서를 보면서 오늘은 33장부터 이렇게 뒤에 마무리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나와서 이제 모든 세 친구들의 이야기와 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엘리후가 먼저 이 결론을 복음으로 이렇게 정리하는 이런 모습을 33장부터 37장까지 보면은 엘리후가 이렇게 하는 대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욥기서를 읽을 때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할 기준: 하나님은 선하시고 마귀는 악한 자이다.
그래서 첫 번째 제가 인제 이것을 보면서 "그렇지, 하나님은 선하시고 마귀는 악한 자다"라는 것이 우리 삶에서 꼭 이게 확실하게 돼 있어야 되겠구나. "하나님은 선하시고 마귀는 악한 자다." 모든 게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다 오는 것만도 아니고 때로는 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테스트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또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요다 선생님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라는 부분을 들었습니다).
또 욥기를 봐도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이 있고 또 욥이 하는 말도 있고 또 나중에 38장부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의 모든 그 언어들이나 이 했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욥에게 이렇게 지적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주에 우리가 지금 누가 말했는지 우리가 등장인물이 누군지 우리가 정말 욥의 친구가 했던 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이것의 그 깊은 의미도 모르고 막 이렇게 액자를 만들기도 하고 선물을 하기도 하는데 아 우리가 정말 이 말씀 안에서 정확하게 알고 넘어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겠다라는 것도 지난주에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한 사람인 욥만 왜 고난을 당하는가? 욥의 주변사람들도 고난을 당해야 되는데 욥만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욥은 원죄를 가진 죄인이였습니다. 욥이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잘못된 유추이다.
그래서 욥기에서는 보면 하나님께서는 왜 선한 사람이 고난당하는 것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이 질문에 대한 이 부분에 대해서 여기서 욥기에서 다 대답을 해야 되고 하는 그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많이 욥기를 통해서 이렇게 들어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나오는 지금 등장인물은 엘리후라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데 이 엘리후는 보면 우리가 33장부터 쭉 이렇게 보면 전혀 친구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욥이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들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를 괴롭히는 것은 욥이 고난당하는 사실이 아니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이 죄를 짓고 자녀들이 무슨 잘못을하고 죄를 지었다면은 욥의 친구들도 당연히 고난을 당해야 되는데 욥의 친구들은 지금 와서 막 정죄하고 처음에는 욥의 그 고통스럽게 입고 막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면서 7일 동안 막 그렇게 울었던 내 친구가 이 고통 당하고 그렇게 울었다는 그 내용을 보면서 나중에는 그냥 저를 막 정죄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엘리후는 정말 욥이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 친구들하고 다 모든 세상에 사람들이 다 고난을 받고 다 고통을 당해야 되는데 왜 욥만 그러냐라는 것을 이렇게 궁금해하면서 이런 말씀을 풀어나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이 원죄라는 이 사실을 죄에 대해서 원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된 사실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엘리후는 이 죄의 저주, 이 저주 아래 있고 고난당할 때는 우리가 화를 낼수록 우리가 죄인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죄를 받고 벌을 받는 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은 자신이 고난당할 때만 깨달아야 된다라고 이것을 엘리후가 이렇게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보면은 우리가 지금 한국분은 수요일 저녁마다 양육관을 합니다.
양육반을 하고 지금 우리 일본부들은 믿음의 반석을 가지고 이렇게 양육반을 받느라고 계속 이렇게 말씀을 이렇게 나누면서 율법은 율법은 자신을 보게 하지만은 은혜는 예수님을 보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6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같이 봅니다. 시작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릅니다."
죄라는 것은 말씀을 말씀대로 믿지 않는 것을 죄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 불신앙을 죄라고 그러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거죠. 믿지 않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 2장 17절에 보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신 것을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이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욥이 고난 당하기 전에네 부유했던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복을 받도록 허락하셨는가? 그 대답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이 복을 받도록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은 욥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된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42장 5절에 보면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을 만한 것을 받았을 뿐이고 내가 특별해서 이 재물의 축복을 받고 특별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정말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모든 자들이 정말 축복받기를 원하시고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정말 그 사랑 안에 가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공의라는 것은 옳음이죠. 그래서 정의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공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고 처리하시고 성실하신 거룩한 성품을 갖다가 공의다, 공의로운 하나님이다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말한 후, 하나님게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부분을 집중해서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 불평을 하거나 원망을 했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십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래서 엘리후의 이 말이 끝나자 엘리후가 이제 하나하나 이렇게 하면서 욥의 친구들에게 쭉 이야기를 했죠.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서 욥의 대답, 그때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면은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라고 욥기 38장 1절과 2절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이랬어요.' '왜 나에게 내가 태어나지 말았을 때' 등 여러 가지 이렇게 불평을 말할 때 우리 하나님은 다 듣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가 또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욥기 38장 1절과 2절을 다른 번역본으로 다 찾아봤습니다.
찾아봤는데 메시지 성경에서 더 좀 이렇게 다가오는 번역이 되어 있어서 제가 메시지 성경의 1절 2절을 보겠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지금 욥에게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폭풍의 눈에서 욥에게 대답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드냐? 어찌하여 너는 잘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하느냐?"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은 때로는 내가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여기 와서 계시라 했다가 저기 와서 계시라 했다가 내가 정말 기도 응답을 받고 뭘 했지만은 상황 가운데서 뭐가 잘 되어지지 않을 때 "왜 하나님은 이렇게 했느냐"고... 어, 우리 여러분들은 그런 일 없습니까? 저는 그럴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은 지금 하나님께서 욥에게 "왜 너가 어찌하여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는 알지도 못하는 말을 이렇게 하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 42장 1절과 5절에서 욥이 이제 하나님을 알고 뭐라고 대답했는지 우리가 천천히 한 목소리로 1절부터 5절까지 같이 보겠습니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면은 여러분들이 욥기에서 1장부터 쭉 이렇게 보면서 욥이 과연 하나님을 잘 알았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과 하나님에 대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느낌과 감정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막 이렇게 이야기한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거예요. 이렇게 깨닫게 되어서 정말 지금까지는 앞에 보면 내가 함부로 말하고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그들의 권리로서 치유와 부요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앞에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믿는다고 이렇게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죄인이라면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라면은 우리가 우리의 치유나 부요를 선포하고 우리가 이것을 치유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들은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에게는 치유와 부요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말씀이 우리가 고린도후서 5장 21절이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내가 착하고 선하게 살고 좋은 일만 해 가지고 의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욥기에서 보는 것처럼 이거는 그냥 착하게 살은 겁니다. 우리가 사람 있는 걸 볼 때...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가 되시면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만들었다는 거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께선 나를 위해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우리가 거듭났고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자... 이 구원 속에는 저번에 말씀했죠. "내가 구원 받았다."라고 한다면은, 이 구원 안에는 옛날에 종합선물세트(가 있습니다)... 이 구원 안에는 치유와 부요와 모든 것이 이 구원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이게 죄인이다, 의인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정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오셔서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이 사실을 내가 확실히 믿는다면은 그때부터 믿음의 걸음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아직 안 돼 있으면은요, 이것부터 다시 시작해 출발해야 되는 거예요.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 해주셨는데 나는 여기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자꾸 죄인이다, 죄인이다라고 많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의인이된 그리스도인의 권세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이 죄인 용서해 달라고 이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리라는 건 언제나 담대하게 오늘 죄책감이나 열등감이나 죄책감 없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누구한테 있다고요. 우리한테 있다는 것입니다. 예, 그래서 우리는 이미 쓸 수 있는 자격을 받은 사람이고요. 또 마귀 앞에 담대히 서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이 정말 이 의인의 자격으로 그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를 보고 우리가 사단이 정말 내 생각으로 혼란하게 만들고 죄책감을 갖다주고 "나는 이게 잘못된 거야. 난 아직 이것도 부족해. 이래서 내가 축복을 받지 못해. 내 자녀가, 내가 이래서 내 자녀가 그랬어." 라고 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 예수 이름으로 떠나가! 나는 하나님의 의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그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는 자의 권세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틈을 죄인의 사고방식에 맞추면 사단에게 틈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의인인 우리는 담대하게 어떠한 정죄감이나 죄책감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 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과 16절도 우리가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 같이 봅니다. 시작.
"우리의 대제사장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우리는 언제나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하면은 "그래, 인간은 어쩔 수가 없어. 아무리 성경이 말씀을 해도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받아들일 때 나에게 모든 문을 열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정말 대제사장인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계시다. 언제나 "아빠, 아버지" 부르면서 정말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대제사장.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언제나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 "나에게 태풍이 몰아오는 것 같애" 할 때 "뭐가 문제야? 기도하면 되지! 나는 오늘도 담대하게 예수님으로 기도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이, 권세가 나에게 있어!"라고 우리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언제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까? 아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에게 제사를 드리라고,욥기 40장 이상에 보면은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그리고 이들은이 지금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도 우리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기 이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욥기서를 자, 여기 42장 7절과 8절을 한 목소리로 같이 보겠습니다. 같이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제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피 흘림을 통해서만 죄가 용서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림으로 인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가 단번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를 기뻐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지금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 중에 이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에게, 세 친구들에게 하나님이 화가 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화가 나셨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 친구들에게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가지고 욥에게 가라는 거예요.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번제라는 것은 우리의 잘못, 죄를 이 짐승으로 태워서 죄를 사하라는 그런 뜻이죠. 그래서 욥이 세 친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 모두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어요. 화는 났지만은 "너희에게 이제 징계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암소하고 양을 가서 짐승을 잡아다가 욥에게 가서 이 번제를 드리라"라고 말씀하는 것을 이렇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욥과 세 친구들에게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피흘림을 통해서만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속죄, 속량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2절에도 "율법을 쫓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었다." 그때는 짐승을 잡아서 이 제사를 드리고 이 죄를 이렇게 깨끗하게 정결케 되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이는 제사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요한복음 1장 17절에 보니까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의 요점은 뭔가 하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는 인간에게는 치유라든지 부요라든지 이런 관계라든지 모든 것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렇지만은.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질병과 죄와 이 가난을 위해 죽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갈라디아서 3장 13절과 14절을 우리가 함께 읽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으니 우리가 이제 그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왔다라고 갈라디아서 3장 13절과 14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 중에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이 은혜의 차이는 그럼 뭔가? "뭐, 어떻게 보면 자비도 은혜 아닌가요?"라고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욥기서를 읽으려고 하면은 어, 욥기서를 볼 때 아,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이전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고 욥기서를 볼 때 희곡으로 쓰여져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실제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또 누가 하나님이 말했는지, 욥의 친구가 말했는지, 엘리후가 이야기했는지, 또 욥의 부인이 이야기를 했는지 이런 부분들을 정확히 보면서 아, 이렇게 성경을 보면은 충분히 이게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아, 이렇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를 한다면은 우리 믿음의 반석 8과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또 지금 우리 또 한국부에서도 (수요일에 양육반을 하면서) 계속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이해한다면은 그냥 이 성경에 얽혀있던 모든 것들이 쫙 이렇게 풀리는 그런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반드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히브리서 1장 3절을 한번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시작.
"이 아들은 완벽하게 하나님을 비추시는 분이며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본성이 도장처럼 찍혀 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말 곧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조화롭게 유지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에 그래서 여러 가지 번역본을 봐야 된다는 게 옛날 개역 성경을 보면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여기 보세요. 하나님의 본성이 도장처럼 찍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도장처럼 찍혀 있습니까? 너무 실제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본성이 도장처럼 찍혀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말이나 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지 못하면은 성경을 읽으면 어려움 투성이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해도 안 되고 "아, 도대체 이거는 뭐 하라는 거야, 말하는 거야"부터 시작해서.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나면은 구약에서부터요, 전부 정말 이게 은혜였구나, 이게 그냥 제사 지내는 게 아니었구나, 결국 나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었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품은 주로 자비로 나타나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고, 또 그들에게 인내하시고 축복하시고 하는 부분들을... 자비는 고통 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비에 대해서 우리 출애굽기 34장 6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그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시길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입니다." 시편 103편 8절에서 11절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의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누가복음 6장 36절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가 자비는 법적 권리에 기초하지는 않습니다.
은혜와 자비의 차이점
은혜는 우리의 법적 권리로써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대신 값을 치루었기 때문에 거저 주는 것이고,
자비는 벌을 받아야 하지만 벌을 안주겠다고 넘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은혜는 법적 권리에 기초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자비에 대해서 한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비에 대해서 누구를 예를 들까, 어떤 분을 주인공으로 삼을까 하다가 제 남편 박 선교사를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같이 있다가 제가 갑자기 어떤 사역이 있어 가지고 집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집에서 있게 되었습니다. 있게 되었는데 혼자서 있다 보니까 집에서 밥도 해 먹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아, 그냥 아내도 없으니까 한번 내가 좋아하는 스시집에 가서 스시를 한번 먹어야 되겠다." 하고 가서 그것도 그냥 저기 '스시로'에 간 게 아니라 오마카세 가서 한번 내 혼자서 한번 제대로 먹어봐야 되겠다 하고 갔습니다. 가서 당신이 먹고 싶은 거 요거 요거 이렇게 또 이렇게 주는 거를 맛있게 막 열심히 먹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배가 불러가는데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지갑을 안 가져왔잖아요. 이거 지갑을 안 가져왔는데 내가 언어를 일본어로 또 참 유창하게 잘해서 이 주인한테 충분히 이해를 시킬 수 있는 지금 그 상황도 아니에요. 아니라서 지금까지 그 스시를 맛있게 먹었던 게 이제 그때부터 막 이제 걱정이 몰려오면,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 할까"라고 가서 그 주인한테, 점원한테 아, 내가 막 이렇게 이제 막 그 열등감이 앞서는 거예요. "이거 나를 안 믿어주면 어떡하지? 나는 진짜, 나는 솔직하고 내가 가서 집에 가서 돈을 가져와서, 지갑을 가져와서 계산을 할 수가 있는데, 만약에 이 사람이 나를 도둑으로 몰고 어떤 다르게 나쁘게 나를 생각하면 어떡할까" 하고 막 이 죄책감과 이 열등감 마음이 막 불안하면서 지금까지 맛있게 먹은 게 다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점원한테 가서 사실은 되는 언어로 막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갑을 집에 놓고 왔다." 지금 거기에 대해서 점원이 어떤 반응이 올 줄 미리 모르면서 막 그 불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아니,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점원이 "아유, 알았다"고, 그러면은 집에 가서 지갑을 가져와서 계산하면 된다고, "아, 잘 알겠다"고, 그냥 이해를 하고 박 선교사를 보내주는 거예요. 다. 그때 이게 자비라는 겁니다. "내가 뭐 이거 못하고 이거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 주시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나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선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 늘 확신이 없고 이 두려움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욥기 3장 25절에 "막 이렇게 오면 어떡하지, 이렇게 하면 어떡하지" 하고 했는데 막상 자기한테 이 어려움이 닥치고 나니까 "아, 내가 욥기 3장 25절에 '마침내 내가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일이 이게 정말 나에게도 왔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게 나에게 왔구나'" 하고 어, 무서워하던 일들이 나에게 왔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것은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하나님께서 내리지 않는 것을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직접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핏값으로. 우리 갈라디아서 3장 13절과 14절을 아까 말씀했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말씀했지 않습니까? 이게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자비라고 한다면은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품은 은혜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이 거룩하신 죄인을 계속해서 죽으시므로,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고난을 덜어주는 것이고, 은혜는 고난을 이기게 한다라고 표현하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는 위로이고 은혜는 승리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어, 우리가 나아가면은, 그래서 욥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을 해석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을 우리 한 목소리로 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내가 착하게 살고 편하게 살아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은혜는 내가 선택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내 죄를 위해서 장사되시고 내 죄를 위해서,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가 믿기만 하면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준비해도 우리에게 주셨지만 (받을 수 없지만) 내가 선택하는 자에게, 내가 믿음으로 취하는 자에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면 계속 정죄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단에게 틈을 내어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권세가 주어집니다. 담대하게 권세를 사용하세요.
미국에 계시는 한 분이 정말 이번에도 횡단보도를 지나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온 전신이 다 이렇게 부러지고 하여튼 지금 그 어려움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보지는 못했지만은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믿음의 한 가족이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분은 지금 이것이 처음이 아니고 몇 번의 그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렇게 당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뭘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이것을 빨리 믿음으로 행동하라고 나에게 이렇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런 자꾸 어려운 사고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책감에 잡히니까 이 죄책감은 사단이 일할 수 있는 문을 확 열어주는 거예요. 이 죄책감 속에 있으면은 사단은 박수 치는 거야. "저 집에 준비됐구나, 내가 저 집에 들어가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복음이, 정확한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내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이 고백은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온 복음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은요, 이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은요, 정말 주일날 어디를 가고 싶은 데도 많고 좀 쉬고 싶은 시간도 많은데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그냥 집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일 예배를 선택하고 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은 나에게 좋은 것들은 전부 사단에게 다 빼앗기는 거예요. 왜? 내가 이 바른 복음을 가지고 내가 승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 생각에서 나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문을 열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온 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라고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완성한 일이 뭐지? 치유. 왜 "치유를 고쳐주세요" 하지 않습니까? "치유"를 우리가 선택하고 "질병을 쫓아내라"는 것이 이 복음 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완성한 일이 뭔지를 한번 여러분들이 찾아서 한번 적어보세요. 노트에 성경을 찾고 이렇게 찾으면서 내 것으로 말씀을 만드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속량 사역, 이 속량 사역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이 한번 믿음으로 취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이거 뭐 했어?" 이러면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어떠한 것 상관없이 이미 역사적인 사실인 거죠. 제가요, 태어나고 보니까 아, 윤가 딸이란 내 성이 윤가라는 거예요.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나는 윤가가 될 거야, 윤가가 될 거야" 한 적이 없어요. 태어나고 보니까 어떻게 보니까 "윤민임"이라고, 나는 윤 씨 딸이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말씀을 믿고 거듭나고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 딸들로 이미 세워놨다는 것을 우리가, 이게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보증은 이미 우리에게 보장된 것입니다. 보증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면 권리를 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성장할 수 있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보증에 대해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청년부에게 어떤 분이 "내가 진짜 청년부에게 이 정말 이렇게 다음 세대를 우리가 일으키는 자들에게, 지팡이를 내밀어 전진하는 해에 정말 나의 은사를 사용하고 본질에 집중하고 다음 세대를 일으키는 이 해에 내가 이 다음 세대에게, 이들이 정말 자기들끼리 이 복음으로 기도해도 하고 하는데 이들에게 뭔가 맛있는 걸 좀 사주고 싶다" 해서 상품권을 또 청년들한테 줬어요. 그런데 이 청년들이 레스토랑이나 어디 가서 이 상품권을 가져가서 "내가 지갑 안 가져왔나? 지갑이 있는가 볼까? 아, 이게 상품권 가짜면 어떡하지"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상품권이라는 거는 이미 그 돈을 현금을 지불하고 이 상품권을 샀기 때문에 이미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이게 의롭다 함인 것입니다. 이게 의롭다 함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된 선물이고 우리는 이 권리를 보증하는 정말 이 식탁에 나가기만 하면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죄와 질병과 가난에서 이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을, 이런 관계에서 지불하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믿고 취한 행사에게는 이미 성령의 검으로 이 어둠을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싸워서 그 자리에서 이겨나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시하고 또 담대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 말씀을 변론하고 또 담대하게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라고 오늘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18절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까지 너와 함께 할 거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어느 곳을 봐도 자비 안에서 자라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
그래서 우리가 결론을 보면 욥기서를 읽을 때 살아계신 속량자 예수 그리스도가 욥기에서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기를 통해서 고난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됩니다. 우리가 고난은 하나님의 시험에 테스트도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시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할 수도 있고 또 고난은 사단의 공격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우리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나는 담대하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어. 우리가 정말 승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야. 나는 여기에 지금 나는 좌절되거나 낙심하지 않아"라고 우리가 마음에 맞설 수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모든 사건이나 모든 상황을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내 생각이나 느낌으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성경적인 관점, 말씀의 기준으로 우리가 성경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설득되어지는 게 믿음인 것입니다.
그냥 교회만 열심히 왔다 갔다, "오늘 예배 드렸어. 아, 오늘 내가 믿음을 행동해서..."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맞죠. 그러나 정말 믿음이라는 의미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설득되어지는 거. 오늘 여러분들이 이 욥기서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무엇이 설득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을 내가 오늘 믿음을 가졌다, 내 말씀을 내가 받았다라고 말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내 생각이 바뀌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냥 말씀 듣고 예배 드렸다가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에 고정관념, 내 생각에 습관적인 거, 이것을 말씀으로 체인지하는 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프린트에 고백기도문을 올렸습니다. 자, 우리 고백기도문 우리 목소리로부터 먼저 한번 고백합니다.
나는 의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의가 되셨으므로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나의 본성입니다. 나는 나의 행동과 상관없이 언제나 아무 죄책감이나 열등감 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설 수 있습니다. 내 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정말 많은 이 구약의 성도들이 죄인이었음을 본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또 아버지 하나님, 나의 행동과 선함으로 아버지 하나님 의인이 되는 것으로 아버지 착각하고 있는 이런 모습들을 보고 나중에 아버지들이 모두가 정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이 자비를 깨닫게 되고 우리가 또 욥기서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의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속량사역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우리 정말 귀한 성도들의 가정과 우리의 믿음의 삶이 종교인이 아니라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며 담대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요약
구약성경, 특히 욥기서를 읽을 때는 새로운피조물의 계시로 읽어야 한다.
욥은 자신이 의인이고 하나님은 완벽하게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원죄를 가진 죄인이였고, 세상에서 선한 사람이였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직 죄인인 상태였다. 저주 아래 있던 죄인들은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욥의 선한 성품과는 무관한 고난 이였다. 엘리후를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고, 자신에 대해서 잘 알게된 욥은 더 큰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닌 은혜아래 있는 자들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지만, 신약시대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자들이다. 의인들은 자신이 가진 믿는자의 권세를 잘 알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에게 틈을 주어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을 기대하고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되고, 반응하는 자들이다.
자비는 고난을 수동적으로 견디게 해주지면, 은혜는 고난을 능동적으로 승리하게 만든다. 의인이된 우리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정죄감없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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